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조금 특이한 숙제가 있었다.
신문 사설을 읽고 글쓴이의 의견에 반박하는 글을 쓰는 것이었다. 학기 중에는 일주일에 한 편이었지만, 방학이면 세 편으로 늘어났다.
방학중에는 분량이 많다보니 사설 원본이 아닌 복사본을 붙여도 허용됐다. 그래서 반이 다른 친구들과 도서관에 모여 각자 맡은 분량을 복사하고, 반박하는 내용도 서로 비슷하게 베껴 쓰곤 했다. 어떻게든 숙제를 빨리 끝내려는 나름의 협업이었다.
그렇게 3년 동안 사설을 읽은 덕분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언어 쪽에 소질이 조금 있었던 걸까. 교과서 내용을 요약하는 숙제를 검사받을 때면 명료하게 정리했다는 칭찬을 받곤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서는 국어 선생님이 갑자기 받아쓰기 시험을 보셨다. 어려운 단어와 띄어쓰기가 섞인 시험이었는데, 수백 명 중 만점자는 나를 포함해 다섯 명도 되지 않았다.
그때 기대가 꽤 크셨던 모양이다. 이후 어리버리한 내 모습을 보실 때마다 선생님은 읊조리셨다.
“도대체 네가 왜 만점을 맞았을까?”
나도 아직 정확한 이유는 모른다.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자매님들과 단어 틀리지 않고 딕션좋게 읽는 게임을 자주 했던 덕분일까? 무튼 난 어릴때부터 언어에 노출이 많이 됐던건 사실이다.
그리고 집에는 찢고, 오리고, 붙이고, 불 태워도 모를 정도로 많은양의 책이 수북히 쌓여있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니 위인전 시리즈였던 것 같다.
이후 사회복지사로 일하면서는 외부지원사업에 신청할 프로포절을 일주일에 두세 개씩 작성해야 했다.
기관마다 추구하는 방향을 파악하고, 우리 사업의 필요성을 설득력 있게 담아내는 일이었다. 아무리 글쓰기가 익숙해도 그 정도 분량은 중노동에 가까웠다.
이직한 뒤에도 사업계획서 작성은 계속됐다. 가끔은 “어디서 베꼈냐”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지금처럼 챗GPT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으니, 직접 생각하고 쓰는 수밖에 없었다.
돌이켜보면 사설 숙제와 닮은 구석이 있었다. 상대가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하고, 그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한 뒤, 읽는 사람이 이해하도록 글로 풀어내는 과정 말이다.
물론 중학생 때부터 그렇게 진지했던 건 아니다. 처음에는 제목과 첫 문단의 주장을 반대로 비틀면 되는 간단한 숙제라고 생각했다. 다만 문단마다 글쓴이의 주장과 내 반박을 써야 했으니 팔은 꽤 아팠다.
그런데 계속 읽다 보니 숙제를 끝낸 뒤에도 생각이 남았다. 친구들과 사설에 나온 주제로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오히려 의아해했다.
“그냥 숙제인데, 왜 그걸 계속 생각해?”
중학교 국어 선생님과 이야기를 나눴다가 대화가 막힌 적도 있었다. 어린 내게 남은 인상은 조금 엉뚱했다. ‘어른도 모르면 화를 내는구나.’
가끔은 어린 내가 읽기엔.. 이해하기엔 너무 비판적이고, 폭력적인 사설도 많았던것 같다.
내가 궁금했던 내용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상대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당시에는 찾지 못해서 혼자 문장을 비틀고, 또 비틀며 생각하곤 했다.
예전부터 주변에서 묻는다. 자녀에게 신문 사설을 읽히고 생각을 정리하게 하면 나처럼 글을 쓸 수 있겠느냐고.
그러면 나는 먼저 아이와 상의해 보라고 말한다. 내 경험 하나로 같은 결과를 약속할 수는 없으니까.
굳이 시작이 사설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동화책이나 만화책 속 대사 한 줄도 충분하다.
“이 인물은 왜 이렇게 말했을까?”
“다른 사람 입장에서는 어떨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내가 사설 읽기를 권한다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말에 질문을 던지고 내 생각을 정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무조건 반대하는 것보다, 왜 동의하고 왜 동의하지 않는지 스스로 설명해 보는 데 의미가 있다고 느낀다.
내게 아쉬움으로 남은 건 생각을 나눌 상대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아이에게 사설을 권한다면, 읽었는지 검사하는 것만큼 그 생각을 들어주는 시간도 있었으면 한다.
아이들이 읽고 쓰는 일을 또 하나의 숙제로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기 생각을 발견하는 경험으로 쌓아 갔으면 한다.
정해진 답에 자신을 맞추는 데 익숙한 어른보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듣고 자기 목소리도 낼 줄 아는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기를 바란다.
'놀면 뭐하니' 카테고리의 다른 글
| 2026 성시경 연말 콘서트 공연일정|팬클럽 선예매·일반예매·티켓가격 (0) | 2026.11.02 |
|---|---|
| 스피또1000 109회 오늘까지만 구입할 수 있어요. (0) | 2026.10.31 |
| 스타쉽 버블 구독 취소하는 방법 (0) | 2026.10.30 |
| 스타벅스 겨울 프리퀀시 2026 이벤트 기간과 참여 방법 (0) | 2026.10.28 |
| 일반 위내시경 후기|수면 위내시경만 받다가 처음 해본 검사 시간·비용 (0) | 2026.10.27 |